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7년 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7년 전쟁.png|width=100%]]}}}|| 단순하게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으로 프로이센에게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빼앗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이를 되찾고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에게 복수하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복수는 단순히 개인적 원한을 떠나, 지난 전쟁으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끊고 정치적으로 완벽히 독립한 프로이센의 국력을 철저히 박살내고 프로이센 왕을 과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처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봉신으로 되돌려놓고 프로이센을 철저히 분할, 과거 공국 수준으로 되돌려 놓겠다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 '브란덴부르크 가가 원래대로 보잘 것 없는 2등 국가로 돌아가는 것' >---- > ★오스트리아 재상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 공작 (전후인 [[1778년]], 전쟁 당시 상황에 대한 보고서)[* 크리스토퍼 클라크(Christopher Clark), <강철왕국 프로이센>, 도서출판 마티(2020), p285, p947] 그러나 이렇게만 볼 경우 이 전쟁이 유럽 전역 및 세계 각지로 확산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강대국으로 부상한 프로이센을 혼자서 압도할수 없어서 동맹국을 끌어들여야 했고, 당시 유럽의 외교 관계는 여러 국가가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전통적으로 영국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의 팽창 야욕에 대항하고 있었고, 프로이센은 이전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의 동맹국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공격한다면 프랑스가 프로이센 편에서 참전하는 것은 기정사실과도 같았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프랑스는 예전부터 눈독들이던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현재의 [[벨기에]]]와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할 것인데, 이미 프로이센만으로도 버거운 오스트리아 입장에서 강력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또 다른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를 이탈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동맹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다. '''한편''', 영국의 [[하노버 왕조|하노버 왕가]]는 오스트리아 편으로 참전할 경우 프로이센과 프랑스라는 두 육군 강국 사이에 끼어있는 [[하노버 공국|하노버]]를 방어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겨 불안에 떨고 있었다. 당시 영국은 하노버 선제후국과 [[동군연합]]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조지 2세]]는 영국의 왕인 동시에 하노버의 선제후로써, 하노버의 안전을 우선 순위로 두고 있었다. 영국의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프로이센을 붙잡아 두는 [[탱커]]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지난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이 한심한 전과를 보인터라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미덥지 못하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영국은 하노버를 지키기 위해 러시아에 군자금을 지원해서 러시아 군대로 프로이센을 견제하는 동시에, 프로이센에도 접근하여 하노버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러시아의 경우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북부의 [[발트해]] 연안으로 진출하고자 하고 있었으며, 이를 완수하기 위해 프로이센과 대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프로이센은 러시아가 노리는 땅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스웨덴[* 스웨덴은 스톡홀름 조약, 뉘스타드 조약과 오보 조약으로 프로이센 왕국, 하노버 선제후국, 러시아 제국에게 빼앗긴 영토에 여전히 관심을 두고 있었다.]이나 독일의 작은 공국들 등 크고작은 나라들이 자신의 이해 관계에 따라 유럽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는 7년 전쟁 발발 이전에도 북미와 [[인도]]에서 [[식민지]]를 두고 이미 무력충돌을 벌이는 중이었다. 거기에 [[스코틀랜드 왕국]]과의 연합왕국을 계기로 [[앤 여왕]] 때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는 1801년까지 프랑스의 왕을 자칭하기도 했다. 물론 진지하게 왕위를 요구한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폼이었다.[* 이후 제위에 오른 나폴레옹과 프랑스의 강력한 반발로 이를 포기하게 된다.] 이렇게 얽히고 설킨 유럽 국가들 사이의 교착 관계는 미묘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어서,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켜서 잘 싸운다고 하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군주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로이센으로부터 슐레지엔을 회복하겠다는 집념에 불타고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지 외교를 통해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자 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넘겨준다는 강수까지 두면서 프랑스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고, 비밀리에 러시아와 동맹을 맺었다. 이 소식을 들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러시아와 프랑스를 견제하고자 영국과 동맹하기로 하였다. 프로이센이 영국편으로 돌아서 버리자 동맹국 없이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버린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을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오스트리아는 이른바 '''[[동맹의 역전]]'''을 통해 단숨에 프로이센을 3면에서 포위하게 되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3면이라기 보다는 2면이다. 프랑스가 프로이센을 공략하기 전에 하노버 공국을 먼저 공격해야 하기 때문에, 영국 본토의 지원을 받은 하노버 공국이 방어에 성공하는 동안에는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2개국을 상대하는 상황이었다.][* 이 새로운 동맹은 [[마리아 테레지아]],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퐁파두르 부인]]이 모두 여성이어서 '''3부인 동맹'''이라고도 불렸다.] 원래 ''''오스트리아-영국 동맹 vs 프로이센-프랑스 동맹''''이였던 외교 관계가 순식간에 ''''오스트리아-프랑스-러시아 vs 프로이센-영국''''으로 바뀐 것이다. 전쟁은 [[프랑스 해군]]이 영국령 미노르카 섬[*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당시 영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양도받은 발레아레스 제도의 섬. 7년 전쟁 직후 스페인에 반환되었다.]을 [[미노르카 해전|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의 프로이센은 예방전쟁 차원에서 [[작센 선제후국]]을 침공하여 점령했다. 이는 독일 내에서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던 프랑스를 자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